[표철민의 창업플러스-15] 벤처를 하다 보면 사이클을 무시할 수가 없다. 1999년부터 시작된 닷컴 호황기가 그랬고 제2의 닷컴 붐이라 불린 최근 3~4년간의 '창조경제' 드라이브 시즌이 그렇다. 2009년 미국발(發)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에 풀린 유동성이 올해 말로 예정된 미국 금리 인상을 시초로 다시 미국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신흥국들이 곤욕을 치르게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넘쳐나는 유동성과 정부의 정책으로 제2의 호시절을 맞았던 우리나라의 벤처 업계도 이제 다시 한번 겨울이 오고 있음을 이해하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

2008년 10월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털 회사인 세콰이어 캐피탈은 피투자기업 CEO들을 모두 본사로 불러 긴급 미팅을 열었다. 여기서 세콰이어 관계자는 무려 56장이나 되는 슬라이드를 준비해 현재 월스트리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고 이것이 금세 실리콘밸리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을 전달했다. 그날 발표의 결론은 "비용을 줄여라, 당장 돈을 아껴라"였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회사는 파산했지만 적어도 세콰이어는 이듬해 금융위기가 심화되기 전 피투자기업들에 미리 경고를 줌으로써 많은 회사를 살릴 수 있었다.

　최근 미국 경제는 최고의 호황기를 구가하고 있다. 실업률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애플을 비롯한 실리콘밸리 대기업들의 실적 또한 매번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또한 정부의 제조업 회귀 전략으로 해외로 갔던 많은 제조공장이 여러 세제 혜택과 아시아 국가의 임금 인상으로 인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에는 지금의 전 세계적 저유가 기조를 만든 미국의 셰일 오일 혁신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조만간 벤처에 위기가 온다면 이는 과거 두 번의 경험과는 달리 미국발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한국 벤처들은 미국의 호황을 지켜보며 우리만 겨울을 맞는, 처음 보는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물론 IMF 때가 있지만 이땐 우리나라에 벤처기업 자체가 별로 없을 때라 논외로 한다)

　미국 금리 인상과 1200조원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문제(대출의 질은 높다 하나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가 오버랩되는), 조만간 뇌관처럼 터질 최근 2년간의 과도한 신규 부동산 분양 물량, 자발적이고 선제적인 구조조정에 실패한 대기업들의 내년 막대한 회사채 도래 물량, 중국의 기술 혁신과 일본의 엔화 약세로 수출 경쟁력을 잃어버린 국내 대기업들의 상품 가치, 대기업의 매출 저하와 빚 상환 문제로 결국 봉착할지 모르는 대량실업 사태, 그리고 그런 경제의 시급성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빠른 대응을 전혀 못하고 있는 정치권까지 총체적 난국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큰 경제적 고비를 맞이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벤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선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 모태펀드 신규 출자액이 제로로 책정되어 통과되었다. 물론 기 설정된 펀드에서 투자가 계속되기에 신규 투자가 끊기는 일은 없겠지만 신규 설정되는 펀드가 줄어들고 민간 부문도 경제가 냉각되고 있으므로 신규 출자를 보수적으로 집행할 것이다. 당연히 전체 투자 집행이 상당히 신중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고 최근 3년간의 창조경제 호시절처럼 하루가 멀다 한 투자유치 소식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많은 스타트업이 도산하거나 중도에 포기할 것이고 그럼 이들이 많아야 존재의 가치가 있는 액셀러레이터와 공동 사무실, 관련 미디어, 엔젤투자사, 스타트업 전문 법무법인과 관련 컨설팅 서비스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IPO를 준비하는 스타트업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시장이 긍정적이어야 좋은 가치로 상장을 하는 것인데 경제에 부정적인 변동성이 예상되면 공모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지수 상황을 보며 상장 시기를 늦추거나 해외 시장에 직상장하는 등 다른 방안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

　어떤 회사가 살아남을까? 앞서 세콰이어가 피투자기업 CEO들에게 요청한 대로 '비용을 줄이고(Cut spending), 비대함을 줄이고(Cut fat), 돈을 아끼는(Preserve capital) 회사가 살아남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투자가 아니라 자기 매출로 살아가는 회사가 살아남게 될 것이다. 투자의 절대적인 숫자가 줄고 당분간 규모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으므로 큰 매출 없이 수십억, 수백억 원씩 투자받아 TV 광고를 하던 회사는 이제 자생력을 키우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해야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묘하게도 지금의 모습은 1999년, 2000년과 너무 닮아 있다. 그때도 인터넷 벤처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등장하더니 2000년 후반 큰 투자를 받은 회사들이 TV 광고와 버스 광고, 옥외 광고를 수십억 원씩 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1년 닷컴 버블이 터지고 2002년이 넘어서까지 생존한 회사는 손에 꼽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골드뱅크, 인티즌, 인츠닷컴, 프리챌 등 사라진 여러 회사가 떠오른다. 시대를 관통해 16년이 지나 이번에는 모바일 벤처가 똑같이 무수히 생겨나더니 누군가는 큰 투자를 받고 대중 광고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TV에서 하루에 앱 광고를 서너 개는 보게 된다. 그중에 정상적으로 자생적인 매출을 내고 있는 앱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창조경제 드라이브 시절에 너무나 높은 밸류에이션을 받아 버린 스타트업들은 지금과 같은 경기 하강기에 밸류에이션의 늪에 빠져 버렸다. 투자자들은 다음 라운드에 자기보다 높은 밸류만을 동의할 뿐 낮은 밸류는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신규 투자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비용 통제와 자생적 매출 증대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누가 더 빠르게 잔치를 끝내고 긴축에 들어가 그 누구의 도움 없이도 먹고사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가 제2의 벤처붐, 스타트업 시대의 최종 승자가 되느냐를 이끌게 될 것이다.

　팀이 워낙 좋고 기술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면 물론 사이클을 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난세고 좋은 회사는 태어나고 세상에 당당히 우뚝 선다. 그러나 그런 회사가 성장 사이클을 타면 더 빨리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다. 더 좋은 인재를 쉽게 수급하거나 더 넓은 시장에서 사업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좋은 기업가가 좋은 시대를 만날 때 비로소 신화는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분명 지난 3~4년은 사업을 시작하기에 오랜만에 너무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성장기 뒤엔 반드시 하강기가 있고 우리는 각각 그 사이클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를 둘러싼 거시 환경들이 호시절의 종료를 두렵게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실리콘밸리의 또 다른 유명 VC 회사인 안드레센 호로위츠의 공동 설립자 벤 호로위츠가 자기 블로그에 남긴 사이클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호황일 땐 누구에게나 현금이 있기 때문에 현금이 많은 것이 꼭 경쟁 우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황일 때는 현금이 많은 것이 막대한 경쟁 우위가 된다. 돈이 없는 경쟁자를 마구 몰아붙여 없애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위기의 시절이, 또 누구에게는 기회의 시절이 찾아온다. 기왕이면 더 늦기 전에 고삐를 당기고 준비하여, 앞으로 다가올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위대한 스타트업으로 나 홀로 살아남기 위한 더 없이 좋은 검증의 무대가 다가온다.

[서울경찰 2기동단 715전경대 일경 표철민, 전 위자드웍스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