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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웰메이드엔 국적 없다 … 노재팬·혐한 넘어선 '스토리의 힘'

김유태 기자

입력 : 
2023-04-14 17:36:22
수정 : 
2023-04-14 23: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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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 문화 해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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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드라마 정주행·역주행 열풍

일본 오사카의 30대 회사원 가토 아키타로 씨는 한국 드라마의 오랜 마니아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는 한국 드라마 '덕후'인 그에게도 오래 기억될 작품이었다. 가토 씨는 "2부를 기다리는 시간이 굉장히 초조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은숙 작가는 전반부에 뿌려놓은 복선을 모두 회수하는 치밀함이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도쿄 시부야에 사는 직장인 미야자키 다카 씨(42)는 지난 2월부터 3월 초까지 전도연·정경호 주연의 '일타 스캔들'을 보는 재미에 살았다. '더 글로리'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전 공백 기간인 2월 20일부터 3월 9일까지 일본 넷플릭스 1위는 한국 드라마 '일타 스캔들'이었다. 미야자키 씨는 "일타 강사 최치열 쌤은 일본에서도 반가운 이름이다.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면 빼놓지 않고 본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 넷플릭스 상위 10개 작품 중 한국 드라마는 모두 6개다(플릭스패트롤 13일 기준). '더 글로리'는 3월 10일 2부 공개 직후 20일간 1위를 차지하다 지금은 5위로 내려갔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일본 넷플릭스 시리즈 1위가 송혜교·장기용 주연의 '지금, 헤어지는 중입니다'라는 것이다. '더 글로리' 열풍이 송혜교의 2021년 작 옛 드라마로 옮겨붙었다. 한 드라마가 유명세를 떨치면 해당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의 옛 작품까지 줄줄이 재소환돼 역주행한다.

조규헌 상명대 한일문화콘텐츠전공 교수는 "한국 드라마 위상이 높아진 데다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더 많은 일본 시청자가 한국 드라마로 유입될 환경이 조성됐다"며 "한국에 호불호가 불명확했던 일본 시청자도 표준화된 넷플릭스로 한국 콘텐츠를 시청하고 더 흔쾌히 받아들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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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넷플릭스 시리즈 2위는 장기용·혜리 주연 '간 떨어지는 동거', 4위는 조승우·한혜진 주연 '신성한 이혼', 5위는 '더 글로리', 6위는 신하균·여진구 주연 '괴물', 7위는 김수현·차승원 주연의 '어느 날'이 올라와 있다.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현재 3위)을 제외하면 1~7위가 전부 한국 작품이다. 일본에서 흥행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 영상 콘텐츠는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공개 직후 글로벌 3위에 올라 톱무비로 자리한 '길복순'도 일본에선 여전히 1위를 지키고 있다.

슬램덩크·스즈메 나란히 '400만 돌파'

한일 문화 교류는 어느 한 나라만의 일방적 짝사랑이 아니다. 올해 1월 전설적인 일본 만화 '슬램덩크'의 북산고-산왕공고 결승전을 영화로 담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초기 흥행 가도를 달릴 때만 해도 1990년대 수업 시간에 몰래 만화책을 봤던 3040세대의 향수 덕분이라는 분석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판으로 판명됐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거대한 열기에 이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이 극장가를 점령해서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을 한국 시장에 들여온 수입사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대표는 "'스즈메의 문단속'은 표면적으로는 동일본 대지진 상처를 다뤘지만, 일본인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인류가 공통적으로 겪기 마련인 재난의 함의를 다뤘다는 점에서 한국 팬들에게도 너른 공감을 얻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로 평단과 대중에게서 동시에 호평받은 신카이 감독의 '재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최근 35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2009년 '아바타' 1편(43일간 1위) 이후 최장 기록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번 주말 '더 퍼스트 슬램덩크' 누적 관객 수를 넘어설 것이 확실하다.

한일 콘텐츠의 우열을 뒤로하고서라도 일본 관객이 한국 콘텐츠에, 한국 관객은 일본 콘텐츠에 호감을 느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노(No)재팬' 열기가 식지 않았던 2021년부터 이런 흐름이 가시화됐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올해 3월 발표한 '한일 영화산업 수출입액 동향'에 따르면 2019년 400만달러 후반대였던 양국 영화 수출입액은 2021년 600만달러 후반으로 증가했다. 최근 수출입액은 1000만달러에 육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사와 문화 소비의 '디커플링'

한일 젊은 세대는 콘텐츠의 '국적'보다는 콘텐츠의 질을 우선시한다. 황재현 CJ CGV 전략담당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스즈메의 문단속'은 관객 만족도가 높았고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즐길 거리인 체험형 이벤트, 굿즈 증정 이벤트가 이어져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강상욱 대표도 "일본 영화 흥행 현상을 한일 간 정치적 관계와 연관 짓고 싶진 않다. 그저 매력적이고 개성적인 일본 작품이 한꺼번에 몰린 것이 아니겠느냐"며 "작년 말 미디어캐슬이 수입한 일본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도 관객 수 110만명을 돌파했는데, 개봉 전 '오세이사' 책 판매량만 40만부였다. 매력적인 작품엔 국경이 없다"고 강조했다.

일본 영화 흥행은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작년 배우 송강호가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브로커'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괴물(몬스터)'이 6월 개봉 예정인 가운데, 이 영화가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으로 선정됐다.

조규헌 교수는 "미국 대중문화가 하나의 보편적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듯이, 한국 문화 콘텐츠도 '한국 콘텐츠'라는 국적을 넘어 세계인의 보편성을 획득했다"며 "한류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세계인 일상 자체에서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됐다. 이제 '탈(脫)한류'가 한류의 정신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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