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자크기 설정

기사 상세

국제

"열흘치 수입품 사면 끝"…'외화 바닥' 파키스탄 경제 파탄

이유진 기자

입력 : 
2023-02-16 17:44:23
수정 : 
2023-02-16 19:01:16

글자크기 설정

수입 원료 의존 경제 구조에
대홍수·에너지난까지 겹쳐
지난달 물가 48년 만에 최고
63년간 IMF 구제금융만 22회
겨우 국가부도 모면한다 해도
정치권 포퓰리즘에 위기 반복
사진설명
지난 10일(현지시간)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에서 파키스탄 마르카지 무슬림 연맹 정당 지지자들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국가 부도 벼랑 끝에 선 파키스탄이 뒤늦게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집행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파키스탄과 IMF는 이달 초 열흘간 마라톤 협상을 벌였으나 합의 도달에 실패했으며 달러 수혈도 늦어졌다. 그사이 외환보유액이 10일치분까지 떨어지자 다급해진 파키스탄 정부는 대규모 증세를 예고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지난 14일(현지시간) 1700억루피(약 8170억원)의 세금을 이달 부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다음주 초 IMF와의 재협상을 앞두고 IMF가 요구한 이행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파키스탄 정부는 지난달 금리를 한 차례 더 인상했으며, 파키스탄 루피와 달러 간 환율 상한선을 폐지하고 유가도 16% 올렸다.

파키스탄은 달러 지원을 단 하루라도 당겨야 할 정도로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 AP통신은 "현재 파키스탄 외환보유액이 20억달러를 약간 웃도는 수준까지 떨어졌다"며 "이는 10일치 수입품밖에 살 수 없는 금액"이라고 전했다. 2월이 사실상 마지막 협상 마감 시점인 셈이다. 통상 다른 국가에서는 최소 3개월치 수입액에 맞먹는 외환보유액을 유지한다.

파키스탄 경제는 전방위 압박을 받고 있다. 지난달 물가 상승률은 27.5%로 4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파키스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지난해 1월부터 7.25%포인트 인상하고도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다. 파키스탄 루피 가치는 지난해 2월 달러당 176루피에서 15일 기준 달러당 266루피로 폭락했다. 지난달 25일 IMF 조건을 맞추기 위해 환율 상한선을 폐지하면서 낙폭이 더 커졌다.

갚아야 할 빚도 많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파키스탄이 2025년까지 상환해야 할 액수가 730억달러(약 92조원)라고 추정했다. 전체 국가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90%인 2740억달러에 달한다. 문제는 파키스탄에 이런 위기가 반복된다는 데 있다. 1950년 IMF에 가입한 파키스탄은 63년간 22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았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올 초 보고서에서 "파키스탄에는 몇 년에 한 번씩 경제 위기가 찾아온다"며 "경제 위기는 외부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설명


파키스탄 수출 중 65%를 차지하는 섬유·의류 제조업은 외국 수입 자재를 가공하는 형태라 대외 변수에 취약하다. BBC는 파키스탄 전역에서 최근 몇 주간 원자재가 떨어진 섬유 제조공장들이 유휴 상태에 돌입했다고 보도했다. 달러가 부족해지자 은행들이 수입업체에 신용장 발행을 거부했고, 이 때문에 카라치 항구에는 의약품에서 식품까지 8000개 이상의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NPR은 "현재 파키스탄은 원자재 수입이 막혀 공장이 멈추고 수출품을 못 만들어 달러를 벌지 못한다"며 "달러 위기가 공급망 위기로 전환됐다"고 진단했다. 지난해 발생한 대홍수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가격 인상도 악재였다.

치솟는 물가에 화폐 가치 하락, 수입품 품귀 현상으로 국민 생활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있다. 현지 매체 더익스프레스트리뷴에 따르면 사람들은 보조금이 지원되는 싼 밀가루를 사러 2~3시간 이상씩 줄을 서고, 우유, 설탕, 콩 등 식료품을 구입하기 위해 빚을 내는 실정이다. 무디스는 올해 상반기 파키스탄 물가 상승률이 평균 33%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파키스탄의 동아줄은 IMF 기금뿐이다. 다음주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면 2019년에 합의했으나 IMF가 집행을 보류한 25억달러 중 11억달러가 들어온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로부터 차관을 통해 일시적으로 달러가 융통되더라도 해결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대홍수로 집을 잃은 이재민은 9만명에 달한다. 홍수로 사라진 도로, 학교 등 기반시설 재건도 장기 과제다. 테러 조직인 파키스탄 탈레반 역시 위험 요인이다. 지난달 파키스탄 경찰을 노린 모스크 폭탄테러는 파키스탄 정부의 탈레반 장악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제 개혁은 요원하다. 올해 총선을 앞둔 파키스탄 정치권은 '표심'을 잃을까 우려해 선심성 정책을 포기하지 못했다. 지난 1월까지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쇼핑몰·예식장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등 소극적인 절전 대책에 그쳤다. 지금은 IMF 기금을 받기 위해 금리 인상과 증세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정책의 지속성을 기대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이다. 파키스탄 지속가능 개발정책연구소 부소장인 사지드 아민 자베드 박사는 "파키스탄은 IMF 구제금융을 받은 후 2~3년간 엄격한 개혁을 실시하지만, 그다음에 선거철이 돌아오면 이 모든 개혁을 수포로 되돌리는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파키스탄이 국가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다고 해도 국민의 살림살이는 단기간에 개선되지 않을 전망이다. 카트리나 엘 무디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15일 로이터통신에 "2024년까지 긴축 정책이 지속되고 식료품 가격 인상으로 저소득층 빈곤율이 높아질 것"이라면서 "지속적인 거시 경제 관리 없는 IMF 구제금융만으로는 경제를 정상궤도로 되돌리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유진 기자]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