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자크기 설정

기사 상세

국제

40년 전통 `100엔 스시` 사라졌다…일본에 무슨 일이?

김규식,손일선 기자

김규식,손일선 기자

입력 : 
2022-10-19 17:51:47
수정 : 
2022-10-19 20:17:55

글자크기 설정

美연준 금리인상에 역주행
엔화 달러당 150엔 목전

수입물가 폭등 방관
中·러·튀르키예도 세계경제 뇌관
◆ 글로벌 인플레 현장 ◆
◆ 글로벌 인플레 현장 ① ◆

일본 도쿄에서 4인 가족 살림을 맡고 있는 주부 A씨는 지난달 전기료 고지서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작년 9월 전기료를 찾아보니 1만600엔 수준이었는데, 올해 9월에는 1만3300엔가량으로 25% 올랐기 때문이다. A씨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먹는 도시락도 10%가량 오른 것을 비롯해 식품, 전기료 등 안 오르는 게 없고 생활비 부담이 크게 늘었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작년에 비하면 계란값이 10% 이상 오른 것을 비롯해 밀가루와 라면, 요구르트 등 거의 모든 제품 가격이 올라갔다는 것이다. 주로 편의점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프리랜서 B씨도 "하루 식비가 200엔 정도 올라 한 달에 6000엔 정도 더 부담하게 됐는데 직업상 적은 금액이 아니다"고 말했다.

올해 초 달러당 115엔 수준이던 엔화값이 149엔대까지 추락하면서 '저물가'의 나라 일본에서 물가 고통을 호소하는 서민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엔화가치가 올해만 30% 가까이 폭락하면서 수입 물가가 급등해 장바구니 물가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코쿠데이터에 따르면 상장 식품회사 105곳이 올해 가격을 올렸거나 올리는 품목은 2만개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8월 일본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8%로 미국 등에 비해 정도가 덜하지만 충분한 임금 상승이 뒷받침되지 못하며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이 5개월 연속 하락했다.

서민을 짓누르는 엔저 상황은 일본은행이 대규모 금융 완화를 고수하며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초긴축 기조와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경기 활성화를 위해 단기금리를 -0.1%로 유지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를 0% 정도로 유도하고 있다. 심리적 마지노선인 '달러당 150엔'이 붕괴될 경우 자금 이탈이 가시화되며 글로벌 경제의 리스크를 키우는 복병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일본처럼 연준과 역주행 통화 정책을 고집하는 국가로는 중국, 러시아, 튀르키예가 있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잘 버티던 위안화값은 최근 달러당 7.2위안 안팎으로 급락했다. 부동산 시장 붕괴를 막기 위한 완화 정책이 중국 내 외국 자금 유출을 부채질하고 있다.

미국 금리 인상을 따라 기준금리를 올리는 과정이 경제적 고통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한국처럼 물가 안정에 방점을 둔 정책 기조가 이를 역행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실익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쿄 = 김규식 특파원 / 베이징 = 손일선 특파원]

"100엔 스시가 사라졌다"…엔화 추락 물가 폭등 악순환

美연준에 역주행하는 일본

'디플레 나라' 日 덮친 인플레
올들어 식품 2만개 가격 올려
전기료도 20% 넘게 인상

수입물가 끌어올린 엔저에
"생활 더 힘들어졌다" 66%
정부 물가대처에 불만 커져
사진설명
미국을 따라가지 않는 '통화정책 역주행'으로 엔화값이 폭락하면서 '인플레이션 공포'가 일본 열도를 덮치고 있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일본 정부의 정책적 선택이지만 물가 상승이라는 단기 고통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일본 경제 구조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불안감이 커지는 모습이다. 특히 주요 7개국(G7)이나 주요 20개국(G20) 등 글로벌 공조체제가 사실상 가동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글로벌 긴축 흐름에 역행하는 일부 국가들의 '나 홀로' 정책은 자칫 세계 경제에 또 다른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염려도 나온다. 앞서 영국도 대규모 재정지출이 필요한 감세정책을 발표했다가 글로벌 시장에 파열음을 초래한 바 있다.

일본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대표적 국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더욱 심각해진 원자재값 상승세를 비롯해 32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엔저 상황이 겹쳤다는 점에서 충격파가 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물가 쇼크'는 일본이 1990년대 이후 30년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의 8월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작년 동월 대비 2.8% 오르며 30년1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 초 0%대를 보이다가 지난 4월부터 5개월째 2%대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미국 등에 비해서는 크게 낮지만 임금이 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체감상 크게 다가온다.

산케이신문이 지난 17~1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물가 상승 영향에 대한 질문에 '매우 힘들어졌다'는 응답이 10%, '다소 힘들어졌다'가 56.2%에 달했다. 이달 초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도 정부 물가 대응을 묻는 질문에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73%에 이르렀다. 이처럼 민심이 싸늘해지고 있는 것은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이 5개월째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식품·외식기업은 가격 인상을 발표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 소고기 덮밥 체인 업체인 요시노야는 이달 1년여 만에 가격 인상에 나서 덮밥 값을 20엔 안팎 올렸다. 회전초밥 업체 스시로도 1984년 창업 이래 유지하던 '접시당 최저가 100엔' 전략을 이달 포기했다. 한 접시당 최저 가격을 기존 100엔(세금 포함 110엔)에서 5~10엔 인상했다.

아사히맥주는 맥주·위스키 등의 가격을 6~17% 인상했고 이토햄은 햄·소시지 값을 3~30% 높였다. 가격 인상은 식품뿐 아니라 20~30% 오른 전기료·가스비를 비롯해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다이는 울트라맨 인형 등 일부 완구 가격을 5~35%, 오다큐전철은 로망스카의 특급 요금을 높였다.

엔저가 예전처럼 수출 증대나 기업 수익 확대를 가져오지도 못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도쿄상공리서치가 이달 5019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엔저(당시 달러당 143엔)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마이너스'라고 답한 기업은 54.1%에 달했다. '플러스'라는 응답은 2.5%에 불과했다.

오히려 엔저가 긍정적 효과보다 물가 상승이나 무역수지 악화 등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나쁜 엔저'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내수기업 등을 중심으로 엔저가 경영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금융완화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물가가 상승하는 데 비해 임금은 오르지 않아 가계가 힘들어지고 있고 기업도 원가 상승을 판매가에 충분히 전가하지 못해 (기업에) 바람직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며 "(엔저와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서는) 금융완화를 그만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은행이 금융완화를 유지하는 주된 이유는 경기 활성화다. 과도한 국가부채나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 등의 영향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무성 추산에 따르면 금리가 1% 오를 때 2025년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엔가량 늘어난다. 일본의 국채 잔액은 작년 말 기준 1000조엔을 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1년 기준 미국 132.6%인 데 비해 일본은 263.1%에 달한다.

엔화값 추락에 일본 정부는 지난달 24년 만에 '엔 매입·달러 매도' 정책으로 시장 개입에 나섰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금융완화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조차도 32년 만의 엔저 상황에 대해 19일 "최근의 엔저 진행은 급속하고 일방적이어서 경제에 마이너스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며 "기업의 사업계획 책정을 곤란하게 하는 등 불확실성을 높인다"고 밝혔다.

[도쿄 = 김규식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