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글자크기 설정

기사 상세

정치

"30년전 마차 다니던 베이징…지금은 자율주행차 달리죠"

손일선 기자

입력 : 
2022-08-22 17:47:11
수정 : 
2022-08-23 13:23:27

글자크기 설정

`한중 경협 30년史` 산증인
이충구 KFTC베이징 사장


1992년 대우 주재원으로 첫발
대우 해체후 車부품사업 나서

당시 중국 그야말로 블루오션
한국 물건은 날개돋친듯 팔려

사드사태 이후 중국 확 달라져
혐한정서 싹트고 기업도 타격

중국기업들 정말 무섭게 성장
한국이 앞서는 분야 몇 개 안돼
◆ 한중수교 30주년 ③ ◆

사진설명
이충구 KFTC 베이징 사장은 1992년 처음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시내를 돌아다니던 마차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남아 있는 1995년 베이징 시내 모습.
"1992년 처음 중국 베이징에 왔을 때 도심에 마차가 다니고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청소부들이 거리에서 말의 배설물을 치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2022년 베이징 도로에는 마차 대신 자율주행차가 달리고 있습니다. 중국의 30년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입니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지 올해로 30주년이 됐다. 30년 전 세계는 중국의 용틀임에 주목했다. 21세기는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졌다.

한국도 이러한 세계 흐름에 올라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자 기업인들이 분주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가장 거대한 시장이 바로 옆에 열렸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인이 달콤한 성공의 꿈을 꾸며 중국으로 향했다. 그런 거대한 행렬에 이충구 KFTC(코리아에프티) 베이징 사장(71)도 있었다. 매일경제신문이 베이징 현지에서 이 사장을 만나 한중 수교 이후 30년간 한국 기업들의 중국 진출 역사와 생존기에 대해 직접 들어봤다.

이 사장이 처음 중국 땅을 밟은 것은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이다. 그는 당시 대우실업 시장개척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국시장을 개척하라"는 김우중 회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서울대 중문과 출신인 그는 바로 다음날 베이징지사로 발령이 났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30년 전 중국시장은 진짜 블루오션이었어요. 그때만 해도 중국에는 괜찮은 상품을 만들 만한 기술력과 자본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상사맨이 괜찮은 물건을 한국에서 가져오기만 하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습니다."

사진설명
2022년 베이징 도로에는 마차 대신 바이두 자율주행택시인 '아폴로'가 달리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물건으로는 팩시밀리를 꼽았다. 당시 중국 기업에는 팩시밀리 생산 기술이 없었다. 이 사장은 "당시 대우통신에서 생산한 팩시밀리를 중국으로 수입했는데 진귀한 제품 대접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 사장은 대우그룹의 중국 진출 역사를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95년에 거의 맨땅이던 옌타이 공업지구에 대우가 굴착기 공장을 지었으며, 1997년 이후에는 약 10억달러를 들여 옌타이, 웨이하이, 칭다오 등에 자동차 부품 공장을 잇달아 설립했다"고 회상했다. 그때 그는 신바람 나게 지방 출장을 다녔다. 이 사장은 "투자 계획서를 들고 출장을 가면 성장이나 시장이 직접 나와 환대해줄 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돌아봤다. 중국은 고속 성장을 이어갔지만 이 사장은 개인적으로 위기를 맞았다. 1999년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대우의 중국 사업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그는 대우를 떠나 2003년 자동차 부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코리아에프티의 중국 법인인 KFTC 베이징 창립 멤버로 참여해 직접 사업을 시작했다. KFTC 베이징은 순이·옌청공장에서 연료 계통 부품 등을 생산해 현대자동차, 볼보 등 완성차 업체에 납품했다.

사업은 순탄했다. 2000년대 들어 현대차의 중국 사업이 빠르게 확대되면서 KFTC베이징도 함께 성장한 것이다. 그는 "당시 한국에 출장을 가면 지인들이 너도나도 꼬치꼬치 물어볼 정도로 중국시장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이때 베이징 한인타운인 왕징도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이 사장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왕징에만 한인이 10만명 거주한다고 할 정도로 사람이 몰려들었고, 큰 한식당은 며칠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만큼 활기가 넘쳤다"고 했다. 당시 한류 열풍도 중국 대륙을 흔들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기회와 부를 가져다준 중국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바로 2016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 이후라고 그는 기억했다. 이 사장은 "사드 사태로 중국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급속도로 악화됐다"며 "당시에 중국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사드 이야기를 꺼내 입을 꼭 닫고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없던 혐한 정서가 중국에 싹텄고, 한국인이 중국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왕징 내 한식당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한국 기업들도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사장은 한국 기업이 위기를 겪은 원인을 사드 사태에서만 찾는 건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30년 동안 중국 기업들이 정말 무섭게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에는 세계적인 회사가 대부분 진출해 있는데, 여기서 중국인이 10년 이상 근무하면서 첨단기술과 최신 경영 기법을 배웠다. 이들이 현재 중국 현지 회사 핵심 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중국 기업들 경쟁력이 빠르게 높아졌다.

이 사장은 "지금 한국 기업의 기술력과 자본력으로 중국 기업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분야는 몇 개 되지 않는다"며 "과거에는 중국이 한국 기업들에 기회의 땅이었지만, 지금은 최대 경쟁자이자 위협 요인이 된 것이 지난 30년간 가장 큰 변화"라고 진단했다.

그는 향후 한국 기업이 중국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 겸손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사장은 "매년 달라지는 중국 경제와 기업들 위상을 직시하고 중국 법규와 문화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 사장은 여생도 중국에서 보낼 계획이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한국인이 많이 떠났지만, 나는 중국에 남아 꿈을 펼쳐나갈 것"이라며 "중국은 내 인생 30년을 바친 또 하나의 삶의 터전"이라고 말했다.

[베이징 = 손일선 특파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가 마음에 들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