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람의 군사경영-44] 자, 오늘은 취향의 얘기를 한 번 해봅시다. '남보람 : 국방부 미 워싱턴, 뉴욕 파견연구원(현재).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파견연구원(2012), 미 육군군사연구소 교환연구원(2013), 미 뉴욕 유엔본부 파견연구원(2016), 국방대학교 군사전략 석사(2007), 미 합동참모대학 합동작전과정(2009), 극동문제연구소 정치외교 박사과정(현재).'

　글의 서두에 사전적 정의를 내세우는 것은 글 쓰는 이에게는 유치한 취향이다.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 스트레스를 받았다가도 이것만 하면 마음 한 쪽이 사르르 녹는 것 같은 그 무엇. 이것이 취향이다. 이 취향의 얘기를 해보려 한다.

　오래전의 일이다. 한 후배가 있었다. 나는 그때 육군 중위였다. 이 후배는 이른바 내 '부사수'로 들어와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남중과 남고를 졸업해서 남자 선배들과 자취를 하고 남자들이 득시글한 군대에서 여전히 남자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울지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문화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의식주에서 헐벗고 굶주리지 않는 것 외에 다른 지향점이 없었다. 그런 나의 취향 없음은 종종 작은 소동이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일행이 호프집에서 하이트를 마시고 있는데 다음 술을 오비라거로 시킨다든가, 팀장이 맘 먹고 데려간 고급 스시집에서 초고추장을 찾을 때는 죄를 지은 것마냥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여튼 다시 그 후배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의 첫 인상은 독특한 향을 풍긴다는 것이었다. 나야 면도하고 바르는 맨담 스킨 외에 화장품이라는 것은 써 본 적이 없었고 그 외의 다른 무언가가 남자에게 필요하다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향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뭐라고 말을 꺼내면서 물어본단 말인가. 그래서 계속 참고 있는 중이었는데 어느 날 대외협력팀의 한 여자 선배가 '00씨 향수 뭐 써? 남자 건 아닌 것 같은데?'라고 물어보았다. 후배는 씨익 웃으면서 '향수에 남자, 여자 게 따로 있나요, 뭐. 저 나인틴 써요'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뚜렷한 문화적 취향을 가진 후배를 통해 이른바 내가 '문화'라 부를 만한 어떤 영역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나인틴이 무엇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배는 머리에는 겐조 향수를, 바지 주머니에는 '샤넬 no.19'을 뿌린다고 했다. 정수리 쪽에 향수를 뿌리는 것은 업무 협조를 하러 자신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오는 사람에게 좋은 향을 직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손목이나 겨드랑이에 향수를 뿌리면 향이 너무 강하기도 하고 오후쯤이 되면 날아가서 없어지기 때문에 바지 주머니에 뿌려놓는다고 했다. 그러면 향도 천천히, 은은히 올라오고 또 필요하면 손을 넣어서 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철두철미한 향수 운용시스템이란 말인가. 어쨌든 그렇게 취향 하나를 고수할 때도 여러 가지 고려 요소와 개성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당시 처음 받은 월급으로 소니 워크맨을 사서 출퇴근할 때 뿌듯한 마음으로 김광석과 이문세 베스트 앨범류를 듣고 있었다. 가요 외에는 별다른 음악적 소양이 없었던 나에게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신세계였다. 그가 빌려준 카세트 테이프로 처음 들었던 카디건스, 자미로콰이, 마일스 데이비스, 스탄 게츠는 아직도 나의 베스트다. 거기엔 U2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니그마에 이르는 방대한 음악적 지식도 포함되었다.

　그가 영어문고판으로 들고 다니던 무라카미 류와 제임스 조이스, 휴가 때 함께 갔던 강남의 싱글몰트바(강남을 그때 태어나서 처음 갔었다), 홍대 인근의 멍키스나 벤츠280 같은 롤카페는 여러모로 이후의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고도 내 삶의 문화적 영역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던 취향들이 많다. 액션이나 SF 외의 영화는 간지러워서 보지 못했던 나를 영화관에 끌고 다니며 로맨스 코미디와 인디 영화를 주입시키던 여자 후배(KFC도 그녀와 처음 갔었다). 체크 무늬를 위아래로 맞춰 입기 좋아하고 양복은 죄다 파크랜드, 캐주얼은 인디언이나 P.A.T 밖에 없는 줄 알고 있던 내게 폴로와 버버리 티셔츠를 선물해준 같은 사무실의 동료. 외식이라고는 한식집이나 패스트푸드점 밖에 몰랐던 내게 브런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태원이라는 곳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처음 알려준 직장 두 해 선배 등등.

　그러니까 나는 사회에 처음 나와서 약 3년 동안은 갑자기 문명세계에 처음 노출된 늑대소년 모오구리 같은 기분으로 주변 동료, 선후배들의 문화적 취향을 흡수해나갔던 것이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주말에 보라색이 많이 들어간 체크무늬 반바지에 흰색 양말을 착실히 갖춘 검은색 샌들을 신고 종로에서 영화를 본 뒤 인근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먹고 나서 집에 돌아와 거실에서 코미디 프로를 보다 잠드는 아저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 취향의 얘길 꺼낸 목적을 말씀드린다.

　필자는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원래 기대했던 인생을 크게 벗어난 삶을 살고 있다. 야전에서 병사들과 운동하고 일과 후에는 동료들과 생맥주 마시며 지내는 것 밖에는 모르고 살 줄 알았는데(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삶이 필자가 그린 미래였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올해로 벌써 서울과 워싱턴, 뉴욕 등을 오가며 햇수로 7년째를 외국에서 보내고 있다. 그러는 동안 국내외에서 학위를 받았고 책을 몇 권 냈다. 방송과 언론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했고 국내 최고의 연구소에서 매년 인터넷 강의를 촬영하고 있다. 그리고 사십대가 찾아왔다.

　몸은 외국을 떠돌고 원해서 온 뉴욕은 아니지만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을 걷노라면 무언가 이룬 것 같기는 한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워싱턴 외곽 이스트마켓이라는 작은 동네의 모텔에서 숙박을 하고 있을 때 소위 멘붕, 중년의 위기가 왔다.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 방송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상황이 왔다.

　우울과 불면, 불안과 허무함이 찾아왔을 때 나를 구했던 것은 바로 취향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없었더라면, 글렌 굴드의 연주가 아니었다면 나는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을 것이다. 뉴욕의 블루노트와 빌리지뱅가드(재즈클럽), 도쿄의 DUG(위스키바)가 아니었다면 혈혈단신으로 건너 간 이국의 도시에서 무엇을 하며 밤을 보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공을 들여 몸을 풀고 요일별로 정성스럽게 작성한 계획에 맞춰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를 하는 습관이 없었다면 나는 패스트푸드의 천국 미국에서 육체적으로 무너졌을 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살다보면 정신과 육체가 변곡점을 지나 하향세로 전환하는 시기를 맞는다. 그리고 그 시기에 자신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모르거나 왜 거기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면 큰 방황과 여러 가지 실수들을 하게 된다.

　젊은 시기에 공들여 키워놓은 취향은 이런 때에 큰 파도 속의 닻이 되거나 앞을 살필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 준다.

[남보람 국방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파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