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인사이트-82]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5년. 윈도 1.0을 막 출시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이하 브리태니커)을 찾아가 CD(콤팩트디스크)판을 내놓자고 제안한다. 브리태니커는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자녀를 둔 가정이면 필수품이었던 '두산동아대백과사전'의 원조 격인 책이다. 브리태니커는 그때만 해도 신생기업이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제안을 거절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후 펑크앤드와그널스 백과사전의 저작권을 사들여 1993년에 디지털백과사전인 '엔카르타(Encarta)'를 내놓는다.

　이 사례는 아날로그 기업이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망한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기술과 시장의 변화에서부터 촉발되는 '파괴적 혁신(Disruption)'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경영진의 오만과 근시안에서 비롯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팩트는 이렇다. 브리태니커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방대한 지식을 두꺼운 백과사전에 담아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 이 내용이 CD롬 한 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그래서 MS 엔카르타보다 훨씬 이른 1989년에 컴튼스백과사전을 CD판으로 내놨다. 이뿐만 아니다. 브리태니커는 1993년 EB.com이라는 도메인을 등록해(이는 웹브라우저가 등장하기도 전이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에도 대비했다.

　브리태니커를 망하게 한 것은 엔카르타가 아니었다. 바로 인터넷 그 자체였다. 검색을 통해서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찾아오면서 백과사전이 필요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위키피디아의 등장은 결정타였다.

　그런데 브리태니커의 신속한 대응은 오히려 기업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변화의 제대로 된 방향을 모른 채 엉뚱한 방향으로 파괴적 혁신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 비즈니스는 본질적으로 '지식'을 파는 사업이라기보다는 '교육' 사업이었다. 부모들은 집안에 구비해 놓은 백과사전이 아이의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수십만 원에 달하는 전질을 구입했다. 실제 콘텐츠보다는 책이 집안 서재에 꽂혀 있는 모습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백과사전 영업사원도 여기에 맞춰 영업을 했고 인센티브도 이를 바탕으로 집행됐다. 영업사원들은 백과사전과 달리 전시해 놓을 수 없는 CD를 가지고는 영업을 할 수가 없었다. 파괴적 혁신은 브리태니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왔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제품부터 영업 방식까지 본질적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이처럼 브리태니커가 CD판을 내놓고 인터넷판을 만드는 등 기존에 해오던 것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경영학에서는 요소혁신(Components Innovatio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근본적인 사업구조를 바꾸고 상품을 바꾸는 것은 구조혁신(Architectural Innovation)이라고 한다. 이는 리베카 헨더슨 하버드대 경영대 석좌교수의 이론이다. 파괴적 혁신은 요소혁신만으로는 대응할 수 없고 구조혁신이 필요하다.

　비슷한 사례로 블랙베리가 있다. 블랙베리는 2007년 6월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자 1년 만인 2008년 9월 터치스마트폰인 블랙베리 스톰을 내놓는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형편없는 터치기능과 버그로 인해 스톰은 '스마트폰 역사상 최악의 재난'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구조혁신 없이 기존의 조직을 유지한 채 내놓은 제품은 도저히 아이폰과 경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파괴적 혁신의 딜레마(Disruption Dilemma)'의 저자 조슈아 갠스 교수는 이처럼 기업들이 파괴적 혁신에 의해 망한 사례를 보면 늦게 대응을 한 경우는 오히려 적고 신속하게 대응하다가 망한 경우가 더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히려 느리지만 철저한 준비를 거친 경우가 더 생존율이 높다는 것. 일찌감치 스마트폰을 만들어왔던 노키아가 망하고, 아이폰 이후 애플을 따라 한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 1위로 부상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기업들이 앞으로 파괴적 혁신이 예상되는 부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2017년 말쯤 출시될 예정인 테슬라의 모델3 전기차는 자동차 산업의 파괴적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GM이나 BMW 같은 기존 내연기관 중심 자동차회사들은 이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기차를 내놓고 있다. 하지만 기존에 해오던 사업이 있기 때문에 테슬라 전기차처럼 저가의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기는 불가능하다. 이 경우 섣불리 먼저 대응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조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갠스 교수의 주장이다. 모델3의 성공 여부를 보고 그 결과에 맞춰 대응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이덕주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