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벤처생활 하면서 뿌듯했던 순간 되돌아보니
2016.03.17 15:02 l 표철민
그 순간이 지난 15년간 항상 유지된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이따금 나도 비전을 정확히 세팅하고 이를 모두가 공유하게 되는 시기에는 사무실이 아주 후끈후끈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돈을 잘 벌 때보다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며 동일하게 최선을 다할 때가 사장으로서 좋은 조직을 만들었다는 기분이 들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좋은 조직이란 무엇일까? 어려서는 '조직'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업 성공만 바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업도 사업이지만 좋은 조직과 함께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가장 뿌듯한 것은 결국 사업의 성패가 아니라 팀과 함께 열정을 다한 순간, 그 과정 자체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자꾸 우리가 같이 최선을 다해 하나의 제품을 만들던 순간을 떠올린다. 하루하루 출근이 기다려지는 날들,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마치 무대에 선 배우와 같이 설레었던 시간들, 퇴근하고 나서도 내가 만드는 제품 생각에 자부심이 들던 순간. 돌아보면 우리가 만들어 낸 것보다 만드는 과정의 생각들, 고민들, 기쁨들, 그때 그 사람들이 자꾸만 떠오르곤 한다. 지금은 각자 갈 길로 떠났고 제품도 어느덧 빛이 바랬지만 적어도 만들던 그때만큼은 너무나 빛났기 때문에.
박봉에 언제 실현될 지 모르는 스톡옵션을 받고 왜 벤처에서 일할까? 나는 벤처 생활이 회사에서의 즐거움이 없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기업을 때려 치고 안정적인 학교를 벗어나 오피스텔에서, 벤처 센터의 지하 골방에서 각자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오로지 내가 하루하루 새로움 속에서 성장한다는 기쁨, 함께하는 사람들의 열정적인 모습 속에서 자극을 받는 것, 그리고 무언가 작지만 우리에겐 중요해 보이는 것을 만드는 즐거움에 있다고 본다.
다른 기쁨은 우리가 그렇게 노력해 만든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하루 중 작은 시간에 내 머리에서 나와서 내 손이 빚은 작품을 사용하며 편의를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는 감사의 리뷰를 남기고 누군가는 혹평을 보낸다. 개선을 통해 혹자는 찬사를 보내고 혹자는 결국 떠난다. 하나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 개선해가는 일은 너무나도 지루하고 보기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그래도 거기 푹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진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이 분야의 작은 발전만큼은 내가 일조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점차 강해짐에 따라 더 집중하게 되고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커 나가게 된다.
벤처 생활의 기쁨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만남이다. 회사 안이나 밖에서 평소엔 만날 수 없던 수많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인생의 충격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도 있구나' 느끼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연한 만남과 소개가 또 다른 기회와 인연으로 이어지고 내 삶을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새로운 발을 내딛지 않는 사람에게 뜻밖의 만남은 주어지지 않으며 기회도 얻지 못한다.
나는 벤처 생활을 하며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해 내 삶이 그 전보다 수백 배는 풍요로워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주위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있었지만 세상엔 나와 정반대의 생각을 하며 살아온 사람도, 엉뚱한 사람, 부정한 사람, 똑똑한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그들을 보며 때론 배우고 반성하고 때론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결국 일천하나마 조금씩 성장한 내 생각의 스펙트럼은 다 그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더 말할 나위 없는 벤처 생활의 기쁨은 또한 경험이었다. 벤처 생활은 지금껏 살며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일들을 우리가 겪게 해주며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힘든 일 한번 없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어떠한 경험이든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배움이요, 기쁨이 된다.
우리는 반복되는 새 경험을 통해 실패와 성공의 일정한 패턴을 배운다. 어떻게 하면 생각한 대로 일이 안 풀리는지, 어떻게 했더니 일이 잘 되는지를 새 경험을 통해 배운다. 성공과 실패의 반복을 통해 그 이유와 패턴을 발견하게 되면 전에 하던 실패를 조금씩 덜 하게 된다.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고 성장해 가는 것이다.
전에 하던 실수나 실패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갖는 기쁨은 매우 크다. 벤처 생활은 나이에 비해 가장 빨리 그 패턴을 학습하게 되는 길이다. 패턴을 익힌다는 것은 점차 더 좋은 아이디어를 발견하고 그것을 남들보다 더 잘 실행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도전이 계속 성공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때때로 눈 앞에서 크고 작은 성공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벤처 생활만큼 패턴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벤처 생활의 기쁨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따뜻한 인간미였다. 각자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묘한 공감대가 있는 것이 벤처인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자신보다 벤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돼 더 걱정하고 있을 동료를 챙기고 가정에 어려움이 있어 곤란해진 동료를 보듬는 모습들을 나는 종종 목격하곤 했다.
언젠가 월급이 밀려 회사에 가득 차 있던 과자 행거가 텅텅 비게 되자, 후배 동료들이 두려움을 가질까 자기 사비로 과자 행거를 가득 채워 놓은 동료가 있었다. 가뜩이나 힘든 내가 마음 쓸까봐 아직 학생인 자기 여자친구에게 돈을 빌려 월세를 내던 직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족이 있는 직원에게는 십시일반으로 월급을 마련해 준 팀도 있었다. 명절 때가 되면 저렴해도 사려 깊게 선물을 고르던 팀과 그 선물에 기뻐하며 고향으로 내려가던 동료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에는 벤처 확인을 받았다고 다같이 모여 과자를 나눠 먹으며 사진 찍던 따스함, 아끼던 동료가 나간다고 다같이 회식을 열고 침울해 하던 자리들, 새로 들어온 식구와의 만남에서 설레며 반짝이던 눈빛들, 새 인턴이 출근하던 날 아침의 활기찬 분위기.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들과 문제를 해결하고 웃으며 갖던 술자리, 처음 사내 연애를 알게 되던 날의 놀라움, 사내 커플 중 하나가 드디어 처음으로 결혼하던 날의 묘한 뿌듯함, 직원의 아이들이 회사에 놀러 온 날 모두가 합심해 만들어 준 솜사탕, 내가 누군가를 내보내자 그를 두둔하던 동료들이 단체로 나를 미워하게 된 순간까지도. 돌아보면 실은 다 따뜻함이었다.
그런 따뜻함을 내가 어디 가서 만나게 될까?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출근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열정에 찬 자신의 모습에 행복해하는 것, 새로운 만남과 경험에 때론 데이고 실패하지만 그 안에서 더없이 성장해가는 것, 작지만 하나의 제품에 집중할 소중한 기회를 갖는 것, 그 제품을 쓰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이 우주를 사는 찰나의 시간에 남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숭고한 보람을 갖게 되는 것.
사장으로서 그런 모든 것들을 겪을 수 있는 플랫폼인 회사를 만들고 하루하루의 실패와 개선 속에 조금씩 '좋은 조직'으로 발전시켜 가는 것. 그 하루하루 속에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할 따뜻함이 있고 뜨거움이 있다.
돈이 아주 많은데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것이 기쁠까? 돈이 있는데 예전에 같이 일하던 동료도, 내가 출근해 설렘을 가질 회사도 없다면 맨날 쇼핑하고 여행 다니는 것이 행복할까? 큰 성공을 거뒀는데 그 과정에 대해 별로 말할 게 없다면, 함께 이룬 동료들이 없다면 어떨까?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벼락 부자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나는 이야기를 나눌 동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과 밤새도록 나눌 수많은 도전과 실패와 배움과 착각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수십억 년의 역사 속에 잠깐의 백 년을 살다 다시 먼지처럼 사라질 우리들일진데 우리가 남길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허상 같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주어진 남은 시간을 함께 웃고 떠들 사람들이고, 같이 노력한 시간의 추억들뿐일 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지금껏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좋은 사람들과 최선을 다하겠지만 과욕을 부리지 않고 과정의 따뜻함과 뜨거움을 그저 사랑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다시 먼지로 돌아가야 할 때, 가장 행복하게 살아왔다 자부할 수 있는 삶의 자세일 것이다.
[서울경찰 2기동단 715전경대 상경 표철민, 전 위자드웍스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