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철민의 창업플러스-20]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군대에 와서 처음 알게 된 말이다. 경영학과, 경제학과 같은 상경 계열이나 어문 계열 전공 학생들이 취직이 어려워서 만든 자조 섞인 신조어란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사업을 하며 겪은 다른 의미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스물두 살이라는 워낙 어린 나이에 창업을 했기 때문에 창업 첫해에 개발자들이 저마다 군대로, 대기업 인턴을 하러 간다고 떠났다. 신입 사원도 아닌 창업 멤버들이 그렇게 책임감 없게 떠난다니 나로서는 참 힘들었다. 멋진 미래를 만들자고 비전을 보여주고 스카우트해 온 디자이너나 다른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음은 물론이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는 이들에게 당신들을 훌륭히 대체할 인물을 데려오고 떠나라고 했다.

　다행히 떠나는 개발자들은 그들의 일 년 선배를 설득해 데려왔고 그 선배는 정말 훌륭히 그들 자리를 메웠다. 메운 것 이상으로 일을 잘했다. 하지만 큰 문제가 있었으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다. 개발자끼리는 비교적 대화가 원활한데 문과 멤버들 말은 잘 들으려 하지 않고 본인이 만들고 싶은 것을 본인이 만들고 싶은 방식대로만 만들었다.

　그전에 같이 일하던 개발자들도 주관이 뚜렷했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기획을 담당하는 문과 멤버들 말을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새로 들어온 개발자는 한술 더 떴다. 나를 비롯한 문과 멤버들이 정말 믿음직한 기획을 하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냥 그때는 서로 어려서 서로의 영역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것 같다.

우리 회사는 십여 년간 인터넷 기술을 기반으로 소비자에게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 제품을 제공하는 이른바 '프로덕트 컴퍼니(Product Company)'였으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기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문과 멤버들이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나왔거나 유수의 경영 컨설팅 회사를 포기하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개발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은 우선 코딩을 할 줄 알고 개발 언어로서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들 입장에서 우리는 구현도 못하면서 기획만 하고 말과 글로만 번지르르하게 현재로선 구현 불가능한 뻥만 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구현할 수 있는 현실과 우리가 보여주는 비전 사이에 그들은 상당한 갭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문과 멤버들의 사업 기획과 서비스 기획에 불신을 표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문제는 자연히 완화됐지만 서로가 어렸던 대학생 시절에는 그 문제가 너무 커서 문과 친구들은 개발자 친구들을 비협조적이라고 답답해 하고 개발자 친구들은 문과 멤버들을 비현실적인데 말만 그럴싸하다고 싫어했다. 그런 불편한 동거가 계속되었지만 나는 어느 누구 편이라도 들면 다른 한쪽이 회사를 떠날까봐 노심초사했다.

　실은 내가 문과였으므로 문과 친구들을 데려오기는 상대적으로 쉽고 이 회사의 핵심은 개발자 기술이기 때문에 개발자들이 하자는 대로 거의 항상 이리저리 끌려다녔던 것 같다. 어려서는 내 바람대로 회사를 끌어가지 못하고 개발자들과 항상 싸우고 그들 비위를 맞추며 일하느라 어려웠던 것 같다.

　최근에 가까이 지내는 회사 소식을 들었는데 그 회사도 예전의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했다. 개발팀은 회사에서 더 오래 있었고 기획팀을 위시한 문과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회사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무엇을 기획하든 개발팀이 "그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냥 신뢰가 적어 무엇이든 일단 반대하고 본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자들이 그 회사 핵심 자산이기 때문에 대표 입장에서도 어떻게 개발팀 의견을 무시하거나 항변할 수가 없이 끌려다닌다고 했다. 그런 상황임에도 개발팀장을 감히 내보내거나 개발팀 전체를 물갈이할 수도 없다고 했다. 당연히 기술 회사 핵심 자산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장은 애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꾸린 팀에 의해 끌려다니고 자기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는 아주 가끔 조금씩밖에 관철을 못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답답했지만 정확히 내가 오랜 시간 겪었고 기술을 잘 모르는 문과 출신 사장이 딱히 어쩔 도리가 없는 그야말로 '문송한' 상황이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다독였다.

　그때는 개발자가 한 명이라도 나가면 회사가 망할 것 같고 그런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어 어찌나 두려운지 이 친구가 아니면 내가 꿈꾸는 것은 만들어 볼 수가 없으므로 끝까지 어르고 달래고 통사정을 해가며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장으로서 통제력은 사라지고 언제나 절대 '을' 위치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했어야만 일이 진행되었을지 모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더 대화가 잘 통하는 개발자를 찾아 그들과 함께 일했으면 훨씬 쉽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다 내가 너무 어렸고 내가 닿을 수 있는 개발자들의 네트워크가 그 정도였기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과거일 것이다.

　그러다 몇 년 전 어느 해부터 나는 원칙을 세웠다. 내가 어르고 달래야 겨우 따라오는 멤버와는 일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최고 인재를 합류시키기 위해 최선의 설득을 다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일단 합류하기로 결정한 멤버는 더 이상 어려워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도 자발적인 판단으로 우리 회사와 함께하기로 했으니 그 이후 회사에서의 최종 의사 결정은 가장 큰 책임을 지는 내가 내린다.

　물론 개발에 있어 최고 전문성은 그들에게 위임하고 나는 믿고 맡기지만 우리가 합의하에 회사에서 하기로 한 일을 등한시하고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방식으로 우선시해 처리하는 사람에게 더 이상 끌려다니거나 좌시하지 않는다는 일의 원칙을 세웠다.

　내가 '문송'해서 끌려다니는 것은 모두에게 훨씬 더 나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개발자가 개인일 때는 자기 취향대로 탐닉하고 개발하는 것이 용인되지만 조직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이상 아무리 개성이 뛰어난 개인이더라도 일정한 책임이 부과된다. 그 사람이 최고기술경영자(CTO)든 개발팀장이든 개발팀 인턴이든 누구에게나 규모 차이는 있을지언정 각자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지켜야 하는 일이 주어지는 것이다. 조직에 합류하기로 했으면서 개인으로 있을 때 좋아하던 취향과 자기 생각대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사람은 프로가 아니다. 협업에 방해가 될 뿐이다.

　이곳이 동아리가 아닌 회사고 돈 내고 일하는 곳이 아니라 돈 받고 일하는 곳이라면 같이 이루기로 한 일을 위해 개인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기 싫어서 회사를 나가 혼자 일하고 혼자 생활하는 사람은 아주 큰 규모의 일을 이루기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회사를 만들고 또는 큰 조직이나 회사에 합류해 우리 실력을 보태며 하루하루 조금씩 큰 일을 실현해 가는 것이다.

　때문에 요즘은 일부러라도 '문송'하지 않으려 한다. 사장이나 기획팀은 문과라서 죄송한 것이 아니라 문과로서 따로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개발자들에게 전문성이 있고 테크 회사 꽃이 개발자들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과 멤버들은 나름대로 테크 회사에서 서로 존중받고 일하며 능력을 발휘할 일정한 업무 영역이 있다.

　어려서는 내가 꿈꾸는 것을 남이 이루게 하려고 그들이 내 말을 안 들을까봐 노심초사했다면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이제는 우리가 같이 꿈꾸는 것을 함께 이뤄내기 위해 서로가 잘하는 분야에서 빛을 발하며 모두가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못하면 그들은 전문성을 살려 세상에 제품을 내놓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들이 못하면 내가 기껏 투자를 받고 세일즈를 해 봐야 고객이 원치 않는 제품이 나오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게 눈치를 보거나 조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치열하게 싸우고 합의된 진전을 조금씩 만들어가야 하는 존재다. 테크 회사의 문과와 이과는 서로 명백히 대등하고 서로가 못하는 영역을 서로 받쳐주는 양 날개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물론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은 있다. 그것은 바로 상호 이해다. '저 친구들은 왜 저렇게 생각할까?' '왜 저런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일까?'에 대해 역지사지 입장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서로 성장 과정이 다르니 마인드 세트가 다를 수밖에 없고 항상 같이 붙어 일하는 동료는 문과는 문과, 이과는 이과다 보니 생각의 틀이 다를 수 있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이 왜 저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더 빨리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어설픈 절충점이 아니라 어느 한 합의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 기준은 오로지 고객이다. 고객이 원하는 것, 고객이 더 편한 것을 기준으로 결론 내려야 한다. 서로 자존심을 팔지 말고 치열한 싸움 끝에 내린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면 내 주장을 완전히 굽히는 훈련을 해야 조직이 건강해진다.

　돌아보면 내가 몸담았던 회사는 다들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었는지 너무나 소모적인 자존심 싸움을 했던 것 같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회사는 사업에 성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사업 성공은 고객이 만들어준다. 누가 의사결정 주도권을 쥐든 지분 구조가 어떻든 다 소꿉장난 같은 얘기인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사장으로서 자존감이 낮다 보니 개발자를 비롯한 직원들과 당시 의견 경쟁을 했던 것 같다. 원래 인간관계란 일방적인 게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 아니겠나.

　이제는 같은 상황을 만났을 때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대등하게 존중하며 일할 수 있는 사람들과 일하기 위해 노력할 것 같다. 같이 꿈을 꾸고 한 조직에서 일하는데도 마치 내 꿈을 대신 이뤄주는 사람에게 빌듯이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나 당당할 것이고 테크 회사와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내가 문과 출신인 것이 핸디캡이 아니라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것으로 행동할 것이다.

　더불어 내 의견도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최대한 마음을 열고 같이 대등한 토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언제든 내 의견을 철회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것이다. 오로지 논리는 자존심이 아니라 고객의 만족과 편의에 기준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 조직에 몸담는 모든 분야 출신 멤버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각자의 전문성을 최대한으로 뽐낼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런 모든 직군과 출신 멤버가 다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정 학교나 학과, 일부 직군 멤버가 갑이 되고 나머지가 지원 부서가 되는 회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15년간 몇 안 되는 고독한 문과 출신 IT 업계 사장으로 언제나 개발자들의 감정을 모시며 '문송'하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나이도 먹고 굳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한다. 회사에서 누가 누구를 모시고 살면 결코 균형 잡힌 좋은 회사는 탄생하지 않는다.

[표철민 서울경찰 2기동단 715전경대 일경·전 위자드웍스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