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철민의 창업플러스-6] 부대에 신병이 왔다. 특별히 말수도 적고 해서 걱정했는데 사정을 듣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편찮으시단다. 부대원 전체가 모여 걱정을 했다. 동기가 혼자라 적응하는 것도 힘들 텐데 밖에 계신 어머니가 아프시다니 어디에도 집중을 할 수 없으리라. 그런 대화를 나누다 몇 년 전 생각이 났다.



5, 6년 전 추석이었다.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다가 아버지가 술이 좀 되셔서 이제 말씀 좀 그만하시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화였다. 병원에 달려가보니 아버지가 아무 말씀을 못 하시고 내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 며칠 전 말씀 좀 그만하시라고 했던 내 이야기가 가슴에 대못이 돼 들어왔다. 이제 정말 말씀을 못 하시는 것이었다.

　병원 설명을 들어보니 뇌경색이 왔는데 며칠간 방치돼 악화됐다고 했다. 당시 회사 문제로 아버지가 혼자 떨어져 사셨는데, 혼자 병원에 안 가고 버티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다 쓰러져 나를 못 알아보는 지경까지 됐다. 이후 2년간 아주 천천히 진행된 회복기를 거쳐 다행히 조금씩 개선이 됐다. 여전히 몸과 말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느려졌지만 그럭저럭 다시 생활할 수 있는 수준으로 회복됐다.

　그러다 암 선고를 받았다. 혈액암이라고 했다. 대장암이나 위암처럼 익숙한 암이 아니어서 가족 모두 적잖이 당황해야 했다. 그러나 들어 놓은 보험도 없고 집에 여윳돈도 없어서 임상시험 중인 항암제를 써야 했다. 약효는 같다고 하나 아직 시판 중인 약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 암에 걸린 아버지에게 임상시험 중인 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미어지게 했다. 사업을 10년 넘게 했다는 것이 스스로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방사능 치료에 머리는 모두 벗겨지고 매일 스스로 배에 주사도 놓아야 했다.

　아버지도 힘들지만 병간호하는 어머니도 나날이 힘들어갔다. 가뜩이나 뇌경색으로 말씀도 잘 못하시는데 암으로 몸이 아프니까 어머니에게 짜증만 내시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못 하고 병원에서 짜준 식단대로 삼시 세 끼를 만드느라 몸이 고단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도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궁근종이라고 했다. 그런데 수술 일정이 한 달이나 후에 잡혀 매일 밤 배를 부여잡고 신음하셨다. 일하다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부모님 두 분의 아픈 모습과 신음 소리를 들으며 마음 졸여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시에 입원하시면서부터는 나도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으로 가서 문병을 했다. 하루에 암 병동과 산부인과 병동을 오가며 두 환자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너무나 처절했다.

　잊을 수가 없는 스물아홉의 가을이었다. 그때는 나도 나대로 회사에서 하던 모든 일이 잘 안 풀려 빚도 많고 월급도 제때 못 주던 때였다. 한 달치 월급을 아는 선배들께 십시일반으로 부탁해 겨우 지급하고 나면 또 어떻게 딱 한 달치 먹고살 일감이 들어와 빚을 갚곤 했다. 몇 년을 가열차게 하던 솜노트 비즈니스가 수백만의 사용자에도 불구하고 수익을 제대로 만들지 못해 힘들어하던 시기다. 몇 년간 안 하던 외주 개발이라도 하며 다시 회사를 '연명' 모드로 돌려야 했다. 그럼에도 직원들이 아무도 떠나지 않고 일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생존의 길을 찾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직원들이 한두 달씩 밀리는 월급도 감내하며 당시 1년간 개발 중이던 솜노트 차기 버전을 꼭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내 모든 신용을 다 끌어와 카드 한도가 제로가 되고 창업 후 처음으로 5개월이나 월급이 밀리게 된 어느 날 솜노트 차기 버전이 출시됐다. 그리고 그 다음달 우린 일본 앱스토어에서 1등을 한 최초의 국산 노트앱이 된다. 사용자는 한 달 만에 곱절로 늘고 마침 매직데이라는 앱을 옐로모바일에 매각하며 그간 빚을 싹 정리하게 된다. 그게 내 서른의 봄이다. 직원들에게 인내라는 큰 빚을 졌고 다행히 하늘이 돕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사랑으로 도와 다시 살아서 나아갈 수 있었다.

　밀린 월급을 모두 주고 그간 꿔온 돈을 이자까지 쳐서 다 주고 나서 혼자 회사 문을 잠그고 나오는데 왈칵 눈물이 났다. 그 사이 어머니가 수술을 잘 받으시고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하셨다. 나는 그 시절 언젠가부터 모니터 밑에 붙여 놓았던 포스트잇 쪽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하나씩 열심히 해결하면 된다." 어려운 상황은 누구나 처음이기에 예고 없이 불현듯 닥치면 겁나고 무기력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돈 꾸러 찾아갈 지인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을 때, 임상시험 약을 쓰는 데 동의해야 했을 때, 아는 의사가 없어 한 달 넘게 하혈을 해도 물어볼 곳이 없었을 때 나 자신에 대한 초라함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럴 때일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나에게 닥친 현실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씩 열심히 해결해가는 것,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거짓말처럼 언젠가 아물고 회복되고 다시 꼭 웃을 날이 온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폈던 지난 4월, 먼지 폴폴 날리던 논산훈련소 연병장에서 수료식을 마친 나는 건강을 되찾으신 어머니, 아버지와 목메는 김밥을 먹었다. 여러 의미로 참으로 목이 메는 김밥이었다. 이제 회사는 생존 후에 추진했던 신사업으로 큰 성장을 이룬 끝에 좋은 회사에 인수돼 훌륭한 후배들이 계속 키워가고 있고 나는 빚을 모두 청산하고 감사하게 군대에 왔다.

　이게 다 무엇이었을까. 꼭 이렇게 힘들어야 했을까. 나는 사업과 참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실력도 없고 운도 없어 여러 사람 고생만 시킨다는 생각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햇수로 16년을 했는데도 여전히 다음달을 걱정하는 벤처 구멍가게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나도 버텼다. 버티니까 또 길이 열렸다. 살았고 다시 웃을 날이 생겼다. 앞으로도 사업을 하든 인생을 살든 영원히 기쁨과 슬픔은 반복의 여정이겠지만 이제 그거 하나만은 안다. 내가 아무리 바보여도 하나씩 열심히 해결하다 보면 아무리 어려운, 처음 만나는 상황이 와도 결국 다시 웃을 날이 온다는 사실. 그 사실을 전해주러 이따가 후임에게 가봐야 하겠다. 어머니가 아프신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지만 그걸로 내가 풀이 죽어 있으면 어느 문제도 더 나아지지 않는다.

[서울경찰 2기동단 715전경대 일경 표철민·전 위자드웍스 대표이사]